피아노 연주, 왜 다양한 경험이 필요할까?
피아노를 전공하다 보면 한 번쯤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넌 사랑도 안 해봤니?”
처음 이 말을 들었던 건 중학생 때였다.
피아노를 치는데 갑자기 사랑이라니. 그때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몰라서 당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음악을 오래 공부하고 직접 연주하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피아노 연주는 악보에 적힌 음을 정확하게 누르는 것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악보를 보고 같은 음을 치더라도 어떤 소리로 들려줄 것인지는 연주자에 따라 달라진다.
그 차이를 만드는 데에는 피아노 밖에서 쌓은 경험도 영향을 준다.
피아노만 치면 표현할 재료가 부족해질 때가 있다
피아노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익히는 것은 악보에 적힌 내용을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이다.
음정을 맞추고, 리듬을 지키고, 악상기호를 확인한다. 이것들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런데 어느 정도 연주가 가능해지고 음악을 표현해야 하는 단계가 오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악보에는 음표가 적혀 있지만 그 음표를 어떤 질감의 소리로 만들 것인지, 멜로디를 얼마나 노래하듯 이어갈 것인지, 한 부분을 얼마나 긴장감 있게 만들 것인지까지 모두 구체적으로 적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같은 악보를 보고도 연주가 다르게 들린다.
나는 피아노 연주를 할 때 결국 악보에 적힌 것을 나만의 소리로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에게 없는 감정이나 이미지, 소리를 갑자기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경험이 필요한 것 같다.
다른 악기의 소리를 떠올리면 피아노가 다르게 들리기도 한다
대학에 들어가서 레슨을 받을 때 선생님께 이런 말을 들었다.
“여기는 호른 소리처럼.”
“여기는 북처럼.”
“여기는 첼로 소리처럼.”
처음에는 나도 의아했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왜 다른 악기의 소리를 생각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직접 해보니 생각보다 이해가 쉬웠다.
호른을 떠올리면 넓고 둥근 울림을 생각하게 되고, 첼로를 떠올리면 선율을 길게 노래하는 듯한 흐름을 생각하게 된다. 타악기를 생각하면 음의 시작을 조금 더 분명하게 만들고 싶어진다.
실제로 피아노의 소리가 다른 악기처럼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소리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이미지가 생기면 손끝에서 만드는 소리도 달라질 수 있다.
| 떠올리는 소리 | 피아노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 |
|---|---|
| 호른 | 넓고 둥근 울림 |
| 첼로 | 길게 이어지는 선율과 노래하듯 흐르는 소리 |
| 타악기 | 분명한 시작과 짧고 또렷한 소리 |
| 작은 현악 앙상블 | 여러 음이 서로 섞이는 방식과 균형 |
그래서 다른 악기의 음악을 많이 들어두는 것이 연주할 때 생각할 수 있는 소리를 늘려주는 데 도움이 된다.
베토벤을 연주하면서 베토벤의 다른 음악을 듣는 이유
음악사 수업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베토벤 소나타를 공부한다면 피아노 작품만 듣지 말고 베토벤의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도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것도 피아노와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꽤 자연스러운 이야기다.
내가 지금 연주하는 소나타 한 곡만 계속 보고 있으면 그 작품 안에 있는 특징만 바라보게 된다. 반면 같은 작곡가가 다른 편성에서 어떤 음악을 만들었는지 들어보면 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긴장감을 만들고, 선율을 이어가고, 여러 성부를 움직이는지를 다른 소리로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작품을 듣는 것은 단순히 음악을 많이 듣는 일이 아니다.
지금 연주하는 한 곡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경험이 될 수 있다.
미술이나 영화가 피아노와 무슨 상관일까?
어떤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미술관에 가보거나 영화와 연극을 보라고 하기도 한다.
입시생 입장에서는 피아노 연습하기도 바쁜데 왜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을 수 있다.
그런데 음악의 표현을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림을 볼 때는 색과 밝기, 어두움, 공간의 분위기를 느낀다.
영화를 볼 때는 인물의 감정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따라간다.
연극을 볼 때는 같은 말을 어떤 표정과 속도, 호흡으로 전달하는지도 보게 된다.
이런 경험들이 피아노 소리로 그대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음악에서 분위기나 긴장감, 호흡, 움직임을 생각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장면이 많아진다.
그래서 피아노 밖의 예술을 보는 것도 결국 음악을 표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감각을 넓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랑도 안 해봤니?”가 꼭 연애를 해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럼 처음 이야기했던 “넌 사랑도 안 해봤니?”는 정말 사랑을 해봐야 피아노를 잘 칠 수 있다는 뜻일까?
당연히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사랑은 누구나 한 번쯤 떠올릴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음악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서정적인 멜로디를 연주하는 학생이 음을 하나씩 뚝뚝 끊어서 치고 있다면,
“여기를 조금 더 따뜻하게 연결해봐.”
라고 말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해봐”라는 말이 학생에게 더 쉽게 와닿을 수도 있다.
그리고 사랑이라고 해도 모두 같은 감정은 아니다.
따뜻할 수도 있고, 애절할 수도 있고, 설렐 수도 있고, 격정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을 경험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감정의 범위가 얼마나 넓고 구체적인가에 더 가깝다.
거창한 경험이 있어야 음악 표현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경험이라고 해서 특별하고 극적인 일을 많이 겪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가족과 함께했던 시간도 있고, 친구와 크게 웃었던 기억도 있다.
여행하면서 오래 바라봤던 풍경도 있고, 반려동물과 지냈던 시간도 있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움직였던 순간, 어떤 음악을 들으며 이상하게 눈물이 났던 기억도 있다.
이런 것들도 모두 나중에 음악을 표현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재료가 된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해본 감정을 바탕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꼭 대단한 일을 많이 경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나온 순간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느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연습하기 전에 1분만 악보 밖을 생각해보자
이런 이야기를 학생에게 해놓고 “그래서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하세요”라고 끝내면 조금 막연하다.
그래서 실제 연습할 때는 아주 간단하게 해볼 수 있다.
오늘 연습할 곡을 펼친 뒤 바로 건반을 누르지 않고 잠깐 생각해본다.
- 이 부분은 어떤 분위기로 들렸으면 좋을까?
- 다른 악기의 소리로 생각한다면 어떤 악기가 떠오를까?
- 영화나 그림 속 한 장면으로 생각하면 어떤 모습일까?
- 내가 경험했던 감정 중 어떤 것과 비슷할까?
- 그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지금 내 소리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이렇게 생각한 다음 같은 부분을 다시 연주해본다.
처음부터 정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악보를 보면서 단순히 “무슨 음을 쳐야 하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음을 어떤 소리로 만들고 싶은가?”까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피아노를 잘 치고 싶다면 피아노 밖도 바라봐야 한다
중학생 때 들었던 “넌 사랑도 안 해봤니?”라는 말은 당시에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 안에는 꽤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악기의 소리를 들어보는 것, 같은 작곡가의 다른 작품을 들어보는 것, 미술이나 영화 같은 다른 예술을 경험하는 것, 그리고 내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감정을 기억하는 것.
이 모든 것이 결국 피아노 앞에서 소리를 만들 때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된다.
악보가 연주할 음악을 모두 대신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연주자는 악보를 읽고, 그 안에 있는 음악을 이해하고, 자신이 가진 소리와 경험을 이용해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피아노 연주가 어느 순간부터 어렵게 느껴진다면 피아노 앞에서만 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가끔은 건반에서 눈을 떼고, 다른 음악을 듣고 다른 것을 보고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돌아보는 것.
그런 경험들이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내가 만들 수 있는 음악의 폭을 조금씩 넓혀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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